신항섭(미술평론가)
우리가 보아온 비현실적인 이미지 또는 초현실적인 그림은 모두 가시적인 세상에 근거한다. 이들 그림은 작가 개인의 경험이나 지식을 토대로 하여 거기에 주관적인 해석을 덧붙이게 된다. 그것이 일찍이 본 일 없는 이미지일지라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주관적인 해석에다 자유로운 상상이 발동하여 지어낸 이들 그림은 시각적인 충격이 따르게 마련이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조형 언어들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림은 우리에게 시각적인 충격과 함께 상상을 자극하는가 하면, 재현적인 그림과는 다른 미적 쾌감을 제공한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는 낯선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 확장된 세계관을 갖게 된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를 형상화하는 그림이 독립적인 회화 장르가 된 것은 무언가 새로운 세상에 관한 호기심과 욕망에 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창훈은 이처럼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이미지와는 또 다른 세상을 꿈꾸어 왔다.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초현실적이기도 한 이미지로 채워지는 듯 싶은데 기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출발했다. 그의 그림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온전히 개별적인 세상이기에 개인적인 꿈의 세계로 치부해도 틀리지 않는다. 물론 잠자는 동안에 펼쳐지는 꿈이 아닌, 조형적인 상상의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주관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상상이 조합해 낸 비정형의 이미지일 따름이다.
그것이 구체적이든 또는 비구상적인 것이든 형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상상이나 몽상의 세계로 인식할 수 있다. 그의 작업과 유사한 이미지의 그림이 존재해 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그림들은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이거나 또는 추상적인 이미지거나 간에 재현성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일견 그의 그림도 그런 유형의 그림으로 인식하기에 십상이다. 적어도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복잡하다 못해 혼잡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기에 그렇다.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데다가 딱히 추상적인 이미지도 아니어서 막연히 초현실 또는 상상이나 몽상의 세계처럼 인식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시각적인 이해일 뿐 그가 추구하는 조형의 세계는 꿈도 아니고 몽상이나 초현실의 세계도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실재하는 세계라고도 할 수 없다. 시지각으로 인지할 수 없을 뿐 엄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자연성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는 자연현상 가운데 바람의 경우 실재하는 사실인데도 우리의 시지각은 인지하지 못한다. 피부를 통해 바람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의 작업은 실재하는 자연현상 또는 우주의 현상까지도 시지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게 아님을 역설하려는 건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비정형의 형태 해석은 자연 현상계를 재현하는 묘사 기법과는 사뭇 다르다. 점과 선, 색채 그리고 명암으로 형상을 만들어 가는 묘사 기법과는 달리, 리듬을 타는 곡선이 지배하는 독특한 화면 구조가 특징이다. 무언가 구체적인 형태를 쫏는게 아니라, 알 수 없는 리듬에 이끌리는 곡선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세상에 없는 것, 그것은 인간의 오감으로도 감지하거나 인지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세계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걸 시각화하는 게 작업의 핵심이다. 이를 구태여 설명한다면 비물질, 또는 반물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물질이란 '에너지, 시간, 운동성'을 가리킨다. 질량을 가진 물질 즉 양성자, 중성자, 전자, 쿼크와 같은 규칙적인 물질로 구성된 것이 자연인데, 이에 반하는 것이 반물질이다. 질량을 가진 임자 형태의 물질이 아니지만 물질을 형성케 하는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가치를 지닌 게 반물질이다.
그러고 보면 빅뱅 시대에 실재했을뿐더러 현재에도 임자가속기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반물질이다. 그는 이와 같은 원초적인 물리 세계의 비가시적인 존재를 시각화한다. 반물질을 시각화할 때 쓰는 조형 언어는 기존의 묘사 기법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물질에 관한 형상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현상이기에 무언가 새로운 방식의 조형 언어를 모색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물론 그 자신조차도 반물질을 본 일이 없기에 지식이나 경험을 동원한 조형 언어를 찾아내기란 난망한 일이다.
여기에서 그는 경험이나 지식을 기대하지 않고 단지 직관력을 신뢰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스케치가 없는 상태, 즉 빈 캔버스와 마주하면서 잠시 세상이 정지한 듯한 짤막한 멈춤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고 나서 공부한 물리학에 근거하는 이미지를 순식간에 캔버스에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 자신조차도 본 일이 없는 비가시적인 세계를 조형화하는 건 순전히 그 자신만의 감각이자 권한이다. 물리학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려니와 인간의 정신세계나 신경 체계와 같은 인간의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시각화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뇌파, 인간 신체를 움직이는 열에너지와 맥박과 같은 진동 또한 비가시적인 세계에 해당한다.
인간의 신체와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상호 연동 작용도 조형의 대상이다. 소우주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의 영역이 탐구의 대상이 되는 건 그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인간을 포함하여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전기(전하)와 같은 에너지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양전하와 음전하가 상호 작용을 함으로써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는 생명을 활성화한다. 이처럼 인간의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현상 및 작용 그리고 에너지의 발생과 방출을 거듭하는 가운데 생명체로서의 지속성을 가지게 된다.
또한 격한 감정 상태를 가진 사람과 차분한 감정 상태의 사람의 차이도 클 수밖에 없다. 신체와 의식 활동에서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게되고 있기에 신체적인 에너지의 소비에도 차이가 있고, 그로부터 파생하는 여러 신체 작용에도 차이가 있게 된다. 예를 들면 남녀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상황에서는 신체적인 에너지는 물론 감정의 소비가 한층 커지게 될 터이고, 그에 따른 에너지의 소비활동과 정신 및 신체적인 기능은 극대화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시각화하는 데는 한 층 세분화한 이미지로 표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신간 '한국 현대미술의 정신’중에서